2006년 05월 28일
Friday Night Magic
끊어서 쓴 전편 묶기만 한 것이므로 날자를 조금 조작하여 앞쪽에다...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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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촌역. 어느 금요일 저녁.
5월답지 않게 후덥지근하던 날씨를 씻어버리기라도 하듯, 시원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른때 같으면 추적추적하다고 싫어했을 사람들도 워낙 날씨가 덥던 차라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 시원해서 좋다는듯, 신촌 거리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지석은 언제나와 같이 유레카로 향하는 중이었다. 익숙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머릿속으론 오늘 준비한 덱(Deck)을 점검하고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기필코.. 슬쩍 눈을 돌려 자신의 옆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따라오고 있는 친구를 돌아보았다.
키는 160이나 간신히 넘을까. 어깨선까지 내려오는 숱 많은 단발과 투명한 피부, 화장이라도 한듯 빨간 입술, 항상 웃음짓고 있는 눈이 마치 여자아이로 보일락 말락 하게 하는 이 친구의 이름은 유청영이라고 했다. 지석과는 벌써 중, 고등학교를 걸쳐 대학까지 7년째 친구로 지내는 죽마고우였다. 청영이는 평소에는 덜렁거리고 기억력도 좋지 못했다. 아마 내일이 지석의 생일이란것도 또 까먹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매직, 아니 꼭 매직뿐이 아니라 무언가 승부를 내는 게임종류만 했다 하면 청영 특유의 이중인격이 발동되었다. 노란 우산을 받쳐들고 어깨를 들썩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보일만도 하지만 청영의 숨겨진 모습을 여실히 아는 지석의 눈에는 웃는얼굴로 사람의 간을 빼먹는 구미호가 떠오를 뿐이었다.
지석은 고등학교 시절, 착실한 학생이던(?) 청영을 매직계에 끌어들인 자신을 다시한번 저주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헤에~그래? 하고 듣던 녀석은 한달이 못되 주변 매직인들 사이에 쳐키로 통했다. 사탄의 인형...
포커페이스도 정도껏이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뒤통수치기, 뒤통수 방어하는 사람 옆구리 찌르기,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극악의 컨트롤덱을 들고오는가 하면 항상 질색하던 랜파덱(Land Destruction Deck)을 들고 나타나 모두를 경악케 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어느순간부터 매주 열리는 토너먼트 FNM(Friday Night Magic)은 이녀석의 독무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던 지석의 귀에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여기 신촌 아이스베리가 어디있어요?"
고개를 들어 보니 귀여운 아이가 보였다. 고등학생 혹은 좀 성숙한 중학생쯤 일지도. 어려 보이는 얼굴에 보조개와 파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나름대로 하얀 원피스에 연두색 가디건을 걸쳤지만 나이를 속이긴 힘든법. 지석은 생긴건 만만찮게 귀여워도 속은 시커먼 악마인 청영이 녀석을 은근히 흘겨보고는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아니, 사실 생각해 보니 아이스베리는 자신들의 목적지인 유레카 바로 건너편이라 마침 잘되었다고 데려다 주기로 하였다.
"감사합니다. 여긴 처음온거라 어디가 어딘지 헷깔리네요."
대낮이긴 해도 옆에 순진함의 극치를 달리는 청영이 있어서 그렇지 나름대로 선이 굵은 지석 자신만 있었으면 데려다 준다는데 일말의 의심도 보이지 않을리 없다고 얼핏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간의 어색함 속에 멀지 않은 아이스베리에 도착하여 지석은 인사를 건냈다. 그때까지도 청영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흥얼거리고 있었다. 저러니 허구한날 길을 잃지..
"여기네요. 안녕히가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가세요."
인사를 나누고 유레카로 내려가는데 그 여자아이가 따라온다.
"아이스베리는 윗층이에요."
"아,, 저 유레카라는 곳을 찾아온거라서요.."
"오, 설마 FNM에라도 참가하시는 건가요?"
"네. 이사온 다음에 매직 할 기회가 없었는데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아왔어요"
"이거 반갑습니다. 저희도 FNM에 온건데.. 앞으로 종종 뵙겠네요."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지하의 보드게임 카페인 유레카로 들어섰다. 지하이긴 해도 환하게 밝힌 할로겐 조명과 여기저기 흩어진 편안한 소파, 밝은톤의 테이블들 덕에 활기찬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평소엔 그리 사람이 많은 편이 아닌 유레카이지만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나름대로 시끌시끌한 분위기를 띄었다. 서울에서 용산 미군부대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FNM이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 지석이랑 청영이 왔냐? 이거 가끔은 안와도 상관없는데 말이야 하하"
"경인이형 왔어요? 이거 사실 나도 청영이는 어따 떨구고 올랬는데.."
"훗 그렇다고 내가 못찾아 왔을꺼 같아?"
"응(x2)"
평소에 늘 보던 사람들이 반겨주었다. 어짜피 한국에 매직(Magic the Gathering)을 하는 인구는 그리 많지 않기에 서로 다 알수밖에 없다. 하지만 때때로 등장하는 뉴페이스도 있는법, 그래서 처음보는 여자아이를 달고 왔어도 그리 큰 관심들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다른 상황이었으면 좀더 관심을 보였겠지만 - 무엇보다 매직인중에 여성 비율은 10%정도에 불과하니까 - 마침 시합시간이 얼마 안남은 관계로 다들 자신의 덱과 전략을 점검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시합 신청 받아요. WCG(Wizard of the Coast Game league) 카드 없으신분은 빨리 만드시고요. 신청하실분은 덱리스트 작성해주세요"
한국 유일의 매직 3레벨 공인 심판인 오크군 - 본명은 따로 있었지만 다들 별명으로만 불렀고 자신도 그것이 더 편한듯 했다 - 이 신청서를 돌렸다. 지석은 자신의 덱리스트를 작성하고 청영이쪽을 돌아보았지만 청영은 이미 작성을 끝내고 덮어놓은 상태였다. 시합이 시작하기도 전에 덱리스트가 공개되는건 치명적이니 당연한 일이긴 한데,, 마치 그런건 전혀 상관없고 그냥 신기할 따름이라는 눈으로 생글거리는 청영을 보니 한대 갈겨주고 싶은 충동이 무럭무럭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자신들과 함께온 그 여자아이도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카드 신청을 안하는 걸로 보아 WCG 카드는 이미 있다는 뜻...즉, 이미 최소 한번이상 공식 매직 토너먼트에 참가한 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놀랄일은 아니리라. 눈이 파란 걸로 보아 외국인이기 쉬울텐데, 외국, 특히 서양쪽에는 MTG(Magic The Gathering)가 한국과는 비교도 안되게 플레이어 수가 많았으니까.
"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대전표를 발표합니다."
오.... 결승에 나가기 전까지는 청영이 녀석과 붙을일이 없는 대전표였다. 내일이 생일이라 주사위신이 보우하신건가...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석은 자신의 덱을 챙겼다.
3시간 후...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함정에 빠진걸까.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쳐 보지만 그럴수록 사냥꾼의 그물은 점점 조여올 뿐이었다. 그렇지만 포기하기엔 이르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수 있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최후의 일초까지 기다렸다. 평정심을 잃고 가진걸 내던져 보아야 산발적인 반항으로는 여기서 벗어나기 힘들다. 기회를 노리고 힘을 아꼈다가 단 한번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한걸음 한걸음, 물러서면서도 패를 모으던 청영은 어느순간 모든 것을 걸었다.
"턴(turn) 종료 전에 커닝 위시(cunning wish)로 마나 탭(mana tab) 가져와서 캐스팅합니다. 턴 받아서 모든 랜드(land) 탭하고 업히발(Upheaval) - 모든 지속물(permanent)을 주인의 손으로 되돌립니다."
하지만-. 상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리고 뽀얀 볼에 보조개가 어리는 것이 청영의 눈에 들어온다. 아차.
"블루(blue)카드 하나 버리고 마나 없이 포일(Foil) 발동합니다. 이만 항복하세요."
주변을 빽빽히 메운 사람들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지난주까지 14주 연속 FNM을 석권해온 청영의 포커페이스가 일그러졌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카드패를 접는다.
"수고하셨습니다."
해방의 날이 왔다! 기나긴 투쟁의 성과(?)로 드디어 독재자는 그 권좌에서 내몰렸다. 웃는얼굴로 목에 칼을 들이대는 사탄의 인형이 드디어 쓰러진 것이다! 게다가 그 대업을 이루어낸 영웅은 수염 까칠한 아쟈씨가 아니라 인형같이 귀여운 여자아이. 그동안 희미하게 미소띤 얼굴로 수많은 희망을 짓밟던 청영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패배감에 상기되 있는것이 이토록 기분좋은 일일줄이야! 유레카 내부는 마치 파티장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에헤헤. 그건 생각도 못했네요. 그러니까 그때 포일을 들고계셨을수도 있으니까, 내가 마나탭을 할게아니라, 커닝위시를 쓰고나서 쓰기위해서 포스스파이크를 아껴두고, 그러고나서..."
경기가 끝나고 청영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듯, 주변에서 뭐라고 놀리는지, 말거는지, 신경도 안쓰고 혼자 계속 낑낑된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소녀가 왠지모르게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다. 뭐 이해가 안되는것도 아니지. 게임 졌다고 저렇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버리니. 사실 이녀석은 처음 배운 순간부터 졌다하면 복기라도 하는지 혼자 한참을 고민했었다. 아니, 좀더 생각해보면 비단 매직할때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일에도 졌다 하면...
"또 이러는군요. 얜 뭔가 졌다하면 왜 졌나 혼자 고민하느라 이렇게 망상모드로 들어가버려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되요"
하고 지석이 하하 웃어보지만 영 어색하다. 게임에 진쪽이 뭔가 그래도 대범한 척이라도 하고 인사하고 등등의 일반적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청영의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오늘안에 정신차릴 가능성은 제로였다. 지석은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 친분이라도 쌓고자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괜찮으시면 제가 술이라도 한잔 살까요?"
아차! 이게 아닌데. 갑자기 생뚱맞은 이야기를 들은 소녀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이런, 어설픈 플레이보이도 안할법한 그런 대사를, 이름도 모르는 아이한테 해버리다니. 지석이 자신의 혀를 저주하고 본능을 탓하는데 소녀의 눈이 예쁘게 휘어진다 싶더니 까르르 웃어버린다.
"이거, 왠지 위험한 분인거 같은데요? 헌팅이란건 처음 당해보는데, 이렇게 훤칠한 미남분이시니 거절할수가 없네요."
하고 소녀는 다시한번 웃어준 뒤 지석의 옆으로 건너와 팔짱을 끼어버리고는 살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로 데려가실꺼에요?"
잠시후 신촌. 어느 호프집.
지석과 소녀는 어색한 공기속에 앉아있었다. 실수로 꺼낸 말이 빼도박도 못하게 데이트 신청 비슷하게 되어버린 지석은 청영을 끌어들여 함께 가려 하였으나 청영은 무반응상태. 하는수 없이 바로 옆의 호프에 오긴 했는데 분위기는 영 어색했다. 뭔가 상황을 타파할 필요를 느낀 지석이 입을 열었다.
"저.. 그러고보니 이름도 모르네요. 이름이라도.."
"후훗 이름도 모르는 여자아이를 헌팅해 오시는 실력자이시라니. 저는 사키라고 부르시면 되요."
"지석이라고 합니다."
사키라.. 지석은 역시 외국인인걸까 하고 생각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외국분이신가봐요? 한국은 매직인구가 얼마 안되서 그정도 실력자분이라면 모를리가 없는데."
"네. 얼마전에 한국에 이사왔어요. 그런데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보다 나이 많으신거 같은데 계속 존대하시니 불편해서.."
"아, 스무살, k대학 06학번입니다."
"오 나랑 동갑이네! 나도 스무살, 이번에 E대학에 유학왔어. 말 놓아도 되지?"
"어 그럼 나도 말 놓을게. 근데 한국말 되게 잘한다. 예전에 한국에서 살았었어?"
"응. 아빠가 외교관이셔서, 어렸을때 한참 한국에 살았었어."
조금 소심한, 평균적인 학생들 정도의 붙임성 밖에는 지니지 못한 지석이지만 사키가 워낙 활달하고 대화를 잘 이끌어 가서 금새 분위기는 꽤 즐거워졌다. 시간이 늦는줄도 모르고 지석과 사키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주로 이야기한 것은 사키쪽이었고, 지석은 맞짱구치고 웃고 술잔을 부딫칠 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밤이 깊는줄도 모르고 이야기하던 둘은 어느덧 시계가 새벽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고 일어났다.
몇시간을 같이 웃고 떠들었는데 밖에 나오니 또 어색하다. 지석은 이럴때 진짜 선수들은 모텔로 데려가겠지, 그럼 모텔에 가서는.. 등등의 생각을 하다 얼굴이 빨개져버렸다. 아아, 스스로 생각해도 남자들의 수준이란.
"괜찮은거 같았는데 꽤 취했나봐? 얼굴, 빨개졌어."
"에? 아 괜찮아. 밖에나오니 밤이라 좀 쌀쌀한거 같아서.."
소녀는 또다시 까르르 웃더니, 사못 진지해져서 물었다.
"아까 그 청영이란 친구, 어떤사람이야?"
"응? 청영이? 음 나랑 중학교때부터 친구야. 애가 좀 승부욕이 있어서, 아까처럼 지면 덤덤하게 넘기질 못해, 나쁘게 생각하지 마."
"그렇구나. 아까 지고나니까 표정도 싹 굳어지고 혼자 막 중얼거리는데 무섭기까지 했지 뭐야."
"하하.. 청영이는 있지, 평소에는 덜렁대고, 이것저것 잘 두고다니고, 길치, 방향치에, 툭하면 엎어지기도 하고, 아무튼 어리버리하거든. 근데 가끔 - 게임같은걸 할때라던가, 진지하게 공부할때라던가, 아무튼 대채로 진심으로 무언가 하고있을때 - 전혀 딴사람처럼, 날카롭고 집중력있게 변해버려. 그러고도 얼굴이랑 행동은 전혀 변화없어서 가끔 이중인격이다, 기분나쁘다, 이런 얘기도 많이듣지. 나도 처음엔 그런줄 알았고. 그런데, 알고보면, 작은 동물을 좋아하고, 조금만 슬픈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도 안보는데 가서 펑펑 울어버리고, 싸우고나면 멀쩡한척 웃고있어도 속으로 미안해하면서 상처받는, 그런 애더라고.."
"둘이 많이 친한가보네?"
"응"
소년과 소녀는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의 신촌 거리를 딱히 가는곳 없이 걸었다. 어느새 지석의 왼손손 안에는 작고 부드러운 손이 맞잡혀 있었다. 소녀의 손은 쓸쓸하게 차가워서, 따뜻해질 때까지 잡아주고만 싶었다. 빠른 세상의 대학생이라기 보다는 옛 소설의 부끄럼 많은 주인공인 것처럼.
"있지, 지석아, 만약에 말이야, 내가 정말 열심히 무언가를 해왔는데 그걸 다른사람이 송두리채 가로챈다면, 역시 화내는게 맞겠지?"
"그렇겠지."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도 무엇인가를 참으로 열심히 해왔는데 그것을 송두리채 잃어서, 화내야하는 상황인데도 화도 못낼만큼 불쌍해 보이고, 이해되어 버린다면 어찌해야할까?"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지금까지 아무 걱정 없는듯 웃고만 있던 소녀의 얼굴에 언뜻 그림자가 스쳐가는듯 싶다. 자기 말로는 대학생이라지만 - 아까 술집에서 신분증 검사도 통과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 중학생이래도 믿을만큼 앳된 소녀에게 드리운 그림자는 왠지모르게 처연하다. 지석은 소녀의 어깨를 감싸주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둘다 어쩔수 없이 그런 일이 벌어진 거라면 말이야..."
"응?"
지석은 소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왠지모르게 담배를 피우지 않는게 안타깝다. 담배에 불을 붙여 씁쓸한 연기를 가득히 들이마시고, 그 연기로 소리내어 말해주어야만 할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어쩔수 없이 자신의 것을 잃고 나의 것을 빼앗았다면. 나라면, 내가 가진 것을 늘려보려 할것 같아."
"늘려보다니?"
"그사람도 자신의 것을 잃고 많이 억울하고, 슬플테니까. 내가 나의 것을 빼앗기고도 화내지 않고, 내가 가진것을 더 늘려서 둘이 써도 모자라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면, 내가 그렇게 노력하고 있으면 나와 함께 노력해서, 둘이 나눠도 모자라지 않게 애쓸꺼라고 믿어."
"바보. 만약에 반대로 나쁜 사람이라면 내가 더 노력한 결과마저 빼앗아 갈꺼 아니야."
"그러게, 바보같지? 그래도-. 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왠지 상대방은 좋은 사람일껏 같아.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어쩔수 없이 네 것을 빼앗는다... 그렇다면, 강한 척 하지만 사실은 여린 사람일꺼야. 빼앗기고도 대어들지 못하고.. 아마 너에게도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까?"
그럴리 없어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소녀는 더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차가웠던 손은 한참을 잡아주었는데도 계속 차가웠다. 지석은 세상엔 분명 착한 사람도 있다고 하고 말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ㅡ어느덧 밝아오기 시작한 새벽 하늘이 예뻤다.
둘은 첫차가 다니기 시작한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언젠가부터 이미 대화는 끊기고 그저 손을 잡고 걸을 뿐이었지만, 결고 적게 마시지 않은 술 탓인지 입을 다물고 나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한 기분이 들었다. 지석이 작별인사를 하기위해 돌아보자 파랗고 검은 오드아이가 지석을 올려다보았다. 조심해서 들어가, 꼭 연락해, 지석이 주섬주섬 인삿말을 챙기며 오른손을 흔드는데 소녀-사키가 몸을 돌려 지석을 마주하고는, 마찬가지로 서늘한 손을 들어 그 손을 잡아버린다.
"데이트, 즐거웠어."
초여름 바람이 지석의 입술을 스치고 사키는 손을 놓고 동틀녘의 거리 사이로 사라져간다. 지석은 또다시, 스스로 바보같다 느끼면서도, 호인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고만 있었다. 문득, 사키가 몸을 돌리며 외쳤다.
"생일축하해!"
ㅡ생일따위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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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촌역. 어느 금요일 저녁.
5월답지 않게 후덥지근하던 날씨를 씻어버리기라도 하듯, 시원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른때 같으면 추적추적하다고 싫어했을 사람들도 워낙 날씨가 덥던 차라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 시원해서 좋다는듯, 신촌 거리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지석은 언제나와 같이 유레카로 향하는 중이었다. 익숙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머릿속으론 오늘 준비한 덱(Deck)을 점검하고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기필코.. 슬쩍 눈을 돌려 자신의 옆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따라오고 있는 친구를 돌아보았다.
키는 160이나 간신히 넘을까. 어깨선까지 내려오는 숱 많은 단발과 투명한 피부, 화장이라도 한듯 빨간 입술, 항상 웃음짓고 있는 눈이 마치 여자아이로 보일락 말락 하게 하는 이 친구의 이름은 유청영이라고 했다. 지석과는 벌써 중, 고등학교를 걸쳐 대학까지 7년째 친구로 지내는 죽마고우였다. 청영이는 평소에는 덜렁거리고 기억력도 좋지 못했다. 아마 내일이 지석의 생일이란것도 또 까먹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매직, 아니 꼭 매직뿐이 아니라 무언가 승부를 내는 게임종류만 했다 하면 청영 특유의 이중인격이 발동되었다. 노란 우산을 받쳐들고 어깨를 들썩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보일만도 하지만 청영의 숨겨진 모습을 여실히 아는 지석의 눈에는 웃는얼굴로 사람의 간을 빼먹는 구미호가 떠오를 뿐이었다.
지석은 고등학교 시절, 착실한 학생이던(?) 청영을 매직계에 끌어들인 자신을 다시한번 저주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헤에~그래? 하고 듣던 녀석은 한달이 못되 주변 매직인들 사이에 쳐키로 통했다. 사탄의 인형...
포커페이스도 정도껏이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뒤통수치기, 뒤통수 방어하는 사람 옆구리 찌르기,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극악의 컨트롤덱을 들고오는가 하면 항상 질색하던 랜파덱(Land Destruction Deck)을 들고 나타나 모두를 경악케 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어느순간부터 매주 열리는 토너먼트 FNM(Friday Night Magic)은 이녀석의 독무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던 지석의 귀에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여기 신촌 아이스베리가 어디있어요?"
고개를 들어 보니 귀여운 아이가 보였다. 고등학생 혹은 좀 성숙한 중학생쯤 일지도. 어려 보이는 얼굴에 보조개와 파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나름대로 하얀 원피스에 연두색 가디건을 걸쳤지만 나이를 속이긴 힘든법. 지석은 생긴건 만만찮게 귀여워도 속은 시커먼 악마인 청영이 녀석을 은근히 흘겨보고는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아니, 사실 생각해 보니 아이스베리는 자신들의 목적지인 유레카 바로 건너편이라 마침 잘되었다고 데려다 주기로 하였다.
"감사합니다. 여긴 처음온거라 어디가 어딘지 헷깔리네요."
대낮이긴 해도 옆에 순진함의 극치를 달리는 청영이 있어서 그렇지 나름대로 선이 굵은 지석 자신만 있었으면 데려다 준다는데 일말의 의심도 보이지 않을리 없다고 얼핏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간의 어색함 속에 멀지 않은 아이스베리에 도착하여 지석은 인사를 건냈다. 그때까지도 청영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흥얼거리고 있었다. 저러니 허구한날 길을 잃지..
"여기네요. 안녕히가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가세요."
인사를 나누고 유레카로 내려가는데 그 여자아이가 따라온다.
"아이스베리는 윗층이에요."
"아,, 저 유레카라는 곳을 찾아온거라서요.."
"오, 설마 FNM에라도 참가하시는 건가요?"
"네. 이사온 다음에 매직 할 기회가 없었는데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아왔어요"
"이거 반갑습니다. 저희도 FNM에 온건데.. 앞으로 종종 뵙겠네요."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지하의 보드게임 카페인 유레카로 들어섰다. 지하이긴 해도 환하게 밝힌 할로겐 조명과 여기저기 흩어진 편안한 소파, 밝은톤의 테이블들 덕에 활기찬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평소엔 그리 사람이 많은 편이 아닌 유레카이지만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나름대로 시끌시끌한 분위기를 띄었다. 서울에서 용산 미군부대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FNM이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 지석이랑 청영이 왔냐? 이거 가끔은 안와도 상관없는데 말이야 하하"
"경인이형 왔어요? 이거 사실 나도 청영이는 어따 떨구고 올랬는데.."
"훗 그렇다고 내가 못찾아 왔을꺼 같아?"
"응(x2)"
평소에 늘 보던 사람들이 반겨주었다. 어짜피 한국에 매직(Magic the Gathering)을 하는 인구는 그리 많지 않기에 서로 다 알수밖에 없다. 하지만 때때로 등장하는 뉴페이스도 있는법, 그래서 처음보는 여자아이를 달고 왔어도 그리 큰 관심들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다른 상황이었으면 좀더 관심을 보였겠지만 - 무엇보다 매직인중에 여성 비율은 10%정도에 불과하니까 - 마침 시합시간이 얼마 안남은 관계로 다들 자신의 덱과 전략을 점검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시합 신청 받아요. WCG(Wizard of the Coast Game league) 카드 없으신분은 빨리 만드시고요. 신청하실분은 덱리스트 작성해주세요"
한국 유일의 매직 3레벨 공인 심판인 오크군 - 본명은 따로 있었지만 다들 별명으로만 불렀고 자신도 그것이 더 편한듯 했다 - 이 신청서를 돌렸다. 지석은 자신의 덱리스트를 작성하고 청영이쪽을 돌아보았지만 청영은 이미 작성을 끝내고 덮어놓은 상태였다. 시합이 시작하기도 전에 덱리스트가 공개되는건 치명적이니 당연한 일이긴 한데,, 마치 그런건 전혀 상관없고 그냥 신기할 따름이라는 눈으로 생글거리는 청영을 보니 한대 갈겨주고 싶은 충동이 무럭무럭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자신들과 함께온 그 여자아이도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카드 신청을 안하는 걸로 보아 WCG 카드는 이미 있다는 뜻...즉, 이미 최소 한번이상 공식 매직 토너먼트에 참가한 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놀랄일은 아니리라. 눈이 파란 걸로 보아 외국인이기 쉬울텐데, 외국, 특히 서양쪽에는 MTG(Magic The Gathering)가 한국과는 비교도 안되게 플레이어 수가 많았으니까.
"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대전표를 발표합니다."
오.... 결승에 나가기 전까지는 청영이 녀석과 붙을일이 없는 대전표였다. 내일이 생일이라 주사위신이 보우하신건가...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석은 자신의 덱을 챙겼다.
3시간 후...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함정에 빠진걸까.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쳐 보지만 그럴수록 사냥꾼의 그물은 점점 조여올 뿐이었다. 그렇지만 포기하기엔 이르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수 있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최후의 일초까지 기다렸다. 평정심을 잃고 가진걸 내던져 보아야 산발적인 반항으로는 여기서 벗어나기 힘들다. 기회를 노리고 힘을 아꼈다가 단 한번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한걸음 한걸음, 물러서면서도 패를 모으던 청영은 어느순간 모든 것을 걸었다.
"턴(turn) 종료 전에 커닝 위시(cunning wish)로 마나 탭(mana tab) 가져와서 캐스팅합니다. 턴 받아서 모든 랜드(land) 탭하고 업히발(Upheaval) - 모든 지속물(permanent)을 주인의 손으로 되돌립니다."
하지만-. 상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리고 뽀얀 볼에 보조개가 어리는 것이 청영의 눈에 들어온다. 아차.
"블루(blue)카드 하나 버리고 마나 없이 포일(Foil) 발동합니다. 이만 항복하세요."
주변을 빽빽히 메운 사람들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지난주까지 14주 연속 FNM을 석권해온 청영의 포커페이스가 일그러졌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카드패를 접는다.
"수고하셨습니다."
해방의 날이 왔다! 기나긴 투쟁의 성과(?)로 드디어 독재자는 그 권좌에서 내몰렸다. 웃는얼굴로 목에 칼을 들이대는 사탄의 인형이 드디어 쓰러진 것이다! 게다가 그 대업을 이루어낸 영웅은 수염 까칠한 아쟈씨가 아니라 인형같이 귀여운 여자아이. 그동안 희미하게 미소띤 얼굴로 수많은 희망을 짓밟던 청영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패배감에 상기되 있는것이 이토록 기분좋은 일일줄이야! 유레카 내부는 마치 파티장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에헤헤. 그건 생각도 못했네요. 그러니까 그때 포일을 들고계셨을수도 있으니까, 내가 마나탭을 할게아니라, 커닝위시를 쓰고나서 쓰기위해서 포스스파이크를 아껴두고, 그러고나서..."
경기가 끝나고 청영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듯, 주변에서 뭐라고 놀리는지, 말거는지, 신경도 안쓰고 혼자 계속 낑낑된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소녀가 왠지모르게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다. 뭐 이해가 안되는것도 아니지. 게임 졌다고 저렇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버리니. 사실 이녀석은 처음 배운 순간부터 졌다하면 복기라도 하는지 혼자 한참을 고민했었다. 아니, 좀더 생각해보면 비단 매직할때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일에도 졌다 하면...
"또 이러는군요. 얜 뭔가 졌다하면 왜 졌나 혼자 고민하느라 이렇게 망상모드로 들어가버려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되요"
하고 지석이 하하 웃어보지만 영 어색하다. 게임에 진쪽이 뭔가 그래도 대범한 척이라도 하고 인사하고 등등의 일반적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청영의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오늘안에 정신차릴 가능성은 제로였다. 지석은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 친분이라도 쌓고자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괜찮으시면 제가 술이라도 한잔 살까요?"
아차! 이게 아닌데. 갑자기 생뚱맞은 이야기를 들은 소녀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이런, 어설픈 플레이보이도 안할법한 그런 대사를, 이름도 모르는 아이한테 해버리다니. 지석이 자신의 혀를 저주하고 본능을 탓하는데 소녀의 눈이 예쁘게 휘어진다 싶더니 까르르 웃어버린다.
"이거, 왠지 위험한 분인거 같은데요? 헌팅이란건 처음 당해보는데, 이렇게 훤칠한 미남분이시니 거절할수가 없네요."
하고 소녀는 다시한번 웃어준 뒤 지석의 옆으로 건너와 팔짱을 끼어버리고는 살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로 데려가실꺼에요?"
잠시후 신촌. 어느 호프집.
지석과 소녀는 어색한 공기속에 앉아있었다. 실수로 꺼낸 말이 빼도박도 못하게 데이트 신청 비슷하게 되어버린 지석은 청영을 끌어들여 함께 가려 하였으나 청영은 무반응상태. 하는수 없이 바로 옆의 호프에 오긴 했는데 분위기는 영 어색했다. 뭔가 상황을 타파할 필요를 느낀 지석이 입을 열었다.
"저.. 그러고보니 이름도 모르네요. 이름이라도.."
"후훗 이름도 모르는 여자아이를 헌팅해 오시는 실력자이시라니. 저는 사키라고 부르시면 되요."
"지석이라고 합니다."
사키라.. 지석은 역시 외국인인걸까 하고 생각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외국분이신가봐요? 한국은 매직인구가 얼마 안되서 그정도 실력자분이라면 모를리가 없는데."
"네. 얼마전에 한국에 이사왔어요. 그런데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보다 나이 많으신거 같은데 계속 존대하시니 불편해서.."
"아, 스무살, k대학 06학번입니다."
"오 나랑 동갑이네! 나도 스무살, 이번에 E대학에 유학왔어. 말 놓아도 되지?"
"어 그럼 나도 말 놓을게. 근데 한국말 되게 잘한다. 예전에 한국에서 살았었어?"
"응. 아빠가 외교관이셔서, 어렸을때 한참 한국에 살았었어."
조금 소심한, 평균적인 학생들 정도의 붙임성 밖에는 지니지 못한 지석이지만 사키가 워낙 활달하고 대화를 잘 이끌어 가서 금새 분위기는 꽤 즐거워졌다. 시간이 늦는줄도 모르고 지석과 사키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주로 이야기한 것은 사키쪽이었고, 지석은 맞짱구치고 웃고 술잔을 부딫칠 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밤이 깊는줄도 모르고 이야기하던 둘은 어느덧 시계가 새벽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고 일어났다.
몇시간을 같이 웃고 떠들었는데 밖에 나오니 또 어색하다. 지석은 이럴때 진짜 선수들은 모텔로 데려가겠지, 그럼 모텔에 가서는.. 등등의 생각을 하다 얼굴이 빨개져버렸다. 아아, 스스로 생각해도 남자들의 수준이란.
"괜찮은거 같았는데 꽤 취했나봐? 얼굴, 빨개졌어."
"에? 아 괜찮아. 밖에나오니 밤이라 좀 쌀쌀한거 같아서.."
소녀는 또다시 까르르 웃더니, 사못 진지해져서 물었다.
"아까 그 청영이란 친구, 어떤사람이야?"
"응? 청영이? 음 나랑 중학교때부터 친구야. 애가 좀 승부욕이 있어서, 아까처럼 지면 덤덤하게 넘기질 못해, 나쁘게 생각하지 마."
"그렇구나. 아까 지고나니까 표정도 싹 굳어지고 혼자 막 중얼거리는데 무섭기까지 했지 뭐야."
"하하.. 청영이는 있지, 평소에는 덜렁대고, 이것저것 잘 두고다니고, 길치, 방향치에, 툭하면 엎어지기도 하고, 아무튼 어리버리하거든. 근데 가끔 - 게임같은걸 할때라던가, 진지하게 공부할때라던가, 아무튼 대채로 진심으로 무언가 하고있을때 - 전혀 딴사람처럼, 날카롭고 집중력있게 변해버려. 그러고도 얼굴이랑 행동은 전혀 변화없어서 가끔 이중인격이다, 기분나쁘다, 이런 얘기도 많이듣지. 나도 처음엔 그런줄 알았고. 그런데, 알고보면, 작은 동물을 좋아하고, 조금만 슬픈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도 안보는데 가서 펑펑 울어버리고, 싸우고나면 멀쩡한척 웃고있어도 속으로 미안해하면서 상처받는, 그런 애더라고.."
"둘이 많이 친한가보네?"
"응"
소년과 소녀는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의 신촌 거리를 딱히 가는곳 없이 걸었다. 어느새 지석의 왼손손 안에는 작고 부드러운 손이 맞잡혀 있었다. 소녀의 손은 쓸쓸하게 차가워서, 따뜻해질 때까지 잡아주고만 싶었다. 빠른 세상의 대학생이라기 보다는 옛 소설의 부끄럼 많은 주인공인 것처럼.
"있지, 지석아, 만약에 말이야, 내가 정말 열심히 무언가를 해왔는데 그걸 다른사람이 송두리채 가로챈다면, 역시 화내는게 맞겠지?"
"그렇겠지."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도 무엇인가를 참으로 열심히 해왔는데 그것을 송두리채 잃어서, 화내야하는 상황인데도 화도 못낼만큼 불쌍해 보이고, 이해되어 버린다면 어찌해야할까?"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지금까지 아무 걱정 없는듯 웃고만 있던 소녀의 얼굴에 언뜻 그림자가 스쳐가는듯 싶다. 자기 말로는 대학생이라지만 - 아까 술집에서 신분증 검사도 통과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 중학생이래도 믿을만큼 앳된 소녀에게 드리운 그림자는 왠지모르게 처연하다. 지석은 소녀의 어깨를 감싸주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둘다 어쩔수 없이 그런 일이 벌어진 거라면 말이야..."
"응?"
지석은 소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왠지모르게 담배를 피우지 않는게 안타깝다. 담배에 불을 붙여 씁쓸한 연기를 가득히 들이마시고, 그 연기로 소리내어 말해주어야만 할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어쩔수 없이 자신의 것을 잃고 나의 것을 빼앗았다면. 나라면, 내가 가진 것을 늘려보려 할것 같아."
"늘려보다니?"
"그사람도 자신의 것을 잃고 많이 억울하고, 슬플테니까. 내가 나의 것을 빼앗기고도 화내지 않고, 내가 가진것을 더 늘려서 둘이 써도 모자라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면, 내가 그렇게 노력하고 있으면 나와 함께 노력해서, 둘이 나눠도 모자라지 않게 애쓸꺼라고 믿어."
"바보. 만약에 반대로 나쁜 사람이라면 내가 더 노력한 결과마저 빼앗아 갈꺼 아니야."
"그러게, 바보같지? 그래도-. 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왠지 상대방은 좋은 사람일껏 같아.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어쩔수 없이 네 것을 빼앗는다... 그렇다면, 강한 척 하지만 사실은 여린 사람일꺼야. 빼앗기고도 대어들지 못하고.. 아마 너에게도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까?"
그럴리 없어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소녀는 더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차가웠던 손은 한참을 잡아주었는데도 계속 차가웠다. 지석은 세상엔 분명 착한 사람도 있다고 하고 말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ㅡ어느덧 밝아오기 시작한 새벽 하늘이 예뻤다.
둘은 첫차가 다니기 시작한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언젠가부터 이미 대화는 끊기고 그저 손을 잡고 걸을 뿐이었지만, 결고 적게 마시지 않은 술 탓인지 입을 다물고 나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한 기분이 들었다. 지석이 작별인사를 하기위해 돌아보자 파랗고 검은 오드아이가 지석을 올려다보았다. 조심해서 들어가, 꼭 연락해, 지석이 주섬주섬 인삿말을 챙기며 오른손을 흔드는데 소녀-사키가 몸을 돌려 지석을 마주하고는, 마찬가지로 서늘한 손을 들어 그 손을 잡아버린다.
"데이트, 즐거웠어."
초여름 바람이 지석의 입술을 스치고 사키는 손을 놓고 동틀녘의 거리 사이로 사라져간다. 지석은 또다시, 스스로 바보같다 느끼면서도, 호인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고만 있었다. 문득, 사키가 몸을 돌리며 외쳤다.
"생일축하해!"
ㅡ생일따위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는데.
-End
# by | 2006/05/28 00:50 | 낙서장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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